에드워드 참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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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참회왕은 1003년에서 1005년 사이에 태어난 잉글랜드 왕으로, 1042년부터 1066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덴마크의 침략으로 노르망디로 망명하여 25년간 생활하며 종교적 신앙심을 키웠고,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립했다. 에드워드는 통치자로서 무능하다는 평가와 성인으로서 덕이 높다는 평가가 공존하며, 사후 1161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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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참회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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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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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드워드 참회왕 |
로마자 표기 | Eadweard Andettere |
라틴어 표기 | Eduardus Confessor |
별칭 | 증성왕 |
출생 | 1003년경 ~ 1005년경 |
출생지 |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아이스립 |
사망 | 1066년 1월 5일 |
사망지 | 웨스트민스터 |
매장지 | 웨스트민스터 사원 |
종교 | 가톨릭교 |
통치 정보 | |
작위 | 잉글랜드인의 왕 |
재위 기간 | 1042년 6월 8일 ~ 1066년 1월 5일 |
대관식 | 1043년 4월 3일 윈체스터 대성당 |
선임자 | 하르다크누트 |
후임자 | 해럴드 고드윈슨 |
가계 정보 | |
왕조 | 웨식스 왕조 |
아버지 | 에젤레드 무책왕 |
어머니 | 노르망디의 엠마 |
배우자 | 웨식스의 이디스 |
성인 정보 | |
기념일 | 1월 5일, 10월 13일 |
시성일 | 1161년 |
시성 장소 | 아나니 대성당 |
시성 결정자 | 교황 알렉산데르 3세 |
주요 성지 | 웨스트민스터 사원 |
2. 생애
1013년 덴마크의 스벤 1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왕위를 차지하자, 에드워드는 어머니 노르망디의 엠마의 고향인 노르망디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그의 깊은 신앙심은 이 시기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 1042년 이부(異父)형제 하레크누드가 죽자, 잉글랜드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는 키가 크고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와 은빛 금발을 가진 뚜렷한 외모를 지녔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연히 정권은 강력한 귀족들의 손에 좌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가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국민적 지지 덕분이었다.[1]
1051년, 에드워드는 약 10여 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장인 고드윈 일파를 몰아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르만인들을 중용하여 앵글로색슨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1053년 고드윈이 죽자, 그의 아들인 해럴드 고드윈슨(해럴드 2세)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게 되었다.[1]
1065년 노섬브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에드워드는 이듬해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에드워드는 조카 에드워드 애설링을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1057년 에드워드 애설링이 사망하자 다시 그의 아들 에드가 애설링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에드가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귀족회의는 해럴드를 해럴드 2세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2세(윌리엄 1세) 등 여러 인물들이 왕위를 주장하며 갈등이 벌어졌고, 결국 윌리엄 1세로 즉위하면서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었다.
에드워드는 통치보다는 수도사의 삶에 더 가까웠으며, 그의 온화함과 정치적 무능함은 앵글로색슨 국가의 안정을 놓치고 노르만 정복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후대에 그는 덕이 높은 군주이자 성인으로 추앙받으며 왕조의 수호자로 존경받았다.
2. 1. 초기 생애와 망명
에드워드는 1003년에서 1005년 사이 옥스퍼드셔주 이슬립에서 에텔레드 2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노르망디의 엠마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1] 그는 친형제인 알프레드 에델링과 여동생 고드기푸가 있었다.어린 시절, 잉글랜드는 바이킹의 습격과 스베인 포크비어드와 그의 아들 크누트 대왕의 침략 대상이었다. 1013년 스베인이 왕좌를 탈취하자 에마는 노르망디로 도망쳤고, 에드워드와 알프레드, 그리고 에텔레드가 뒤따랐다.[2] 스베인은 1014년 2월에 사망했고, 잉글랜드 지도자들은 에텔레드가 이전보다 '더 정의롭게' 통치할 것을 약속한다면 그를 다시 맞이할 것을 제안했다. 에텔레드는 동의하여 에드워드를 사절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려보냈다.[3] 에텔레드는 1016년 4월에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에드워드의 이복 형인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스베인의 아들 크누트와의 싸움을 계속했다. 에드먼드는 1016년 11월에 사망했고, 크누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다시 형제자매와 함께 망명 생활을 시작했고, 1017년 그의 어머니는 크누트와 결혼했다.[4]
에드워드는 25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였는데, 아마도 주로 노르망디에서 지냈을 것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강렬한 개인적 경건함을 발전시켰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것이 그의 시성을 위한 후기 중세 운동의 산물이라고 간주한다. 프랭크 바를로는 "그의 생활 방식은 전형적인 시골 귀족의 생활 방식과 유사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5] 그는 이 기간 동안 잉글랜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그의 야심찬 어머니는 크누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르타크누트를 지원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1037년 하롤드가 왕으로 인정받았고, 이듬해 에마를 추방하여 브뤼헤로 가게 했다. 그 후 에마는 에드워드를 소환하여 하르타크누트를 돕도록 요구했지만, 그는 침공을 시작할 자원이 없었고 왕좌에 대한 어떤 관심도 부인했다. 덴마크에서 자신의 지위가 안정되자 하르타크누트는 침공을 계획했지만, 하롤드는 1040년에 사망했고, 하르타크누트는 어머니와 함께 아무런 저항 없이 잉글랜드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다.
1041년 하르타크누트는 에드워드를 잉글랜드로 불렀는데, 아마도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상속자로 삼았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허스트셰버(현대 와이트 섬 맞은편 허스트 스핏 근처)에서 "잉글랜드 전역의 테인들"을 만났다. 거기서 에드워드는 크누트의 법을 계속 지킬 것이라는 맹세를 하고 왕으로 받아들여졌다.
2. 2. 잉글랜드 왕 즉위
1013년, 덴마크의 잉글랜드 침공으로 어린 시절 어머니의 고향인 노르망디로 망명하였다. 1041년 이부동생 하레크누드의 부름을 받아 잉글랜드로 돌아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하레크누드가 1042년에 사망하자, 1043년 4월 3일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에드워드는 큰 키에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은빛을 띤 금발을 가진 뚜렷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에드워드 왕의 생애`에서는 그를 "매우 당당한 체격의 인물"이며 "키가 매우 크고, 우윳빛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수염, 통통한 얼굴과 장밋빛 볼, 가늘고 하얀 손, 그리고 길고 투명한 손가락으로 구별"된다고 묘사하고 있다.[1]
2. 3. 통치와 권력 투쟁
에드워드는 왕위에 올랐으나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귀족들이 권력을 차지하여 정치를 주도했지만, 신앙심을 바탕으로 국민적인 지지를 받아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1]1045년 1월 23일, 에드워드는 유력 귀족 고드윈의 딸 에디스와 결혼했다.[1] 고드윈 가문은 남부 영국 전체를 종속적으로 지배하였다.[1] 그러나 1051년 에드워드는 장인 고드윈 일파를 몰아내었다.[1]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노르만인들을 중용하여 앵글로색슨인들의 반감을 샀다.[1]
1052년 고드윈과 그의 아들 해럴드가 귀환하면서 노르만 유력자들은 축출되었다.[1] 1053년 고드윈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해럴드가 정권을 장악했다.[1]
1050년대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 대해 대체로 성공적인 정책을 추진했다.[1] 1054년 맥베스를 물리치고 말콤 캔모어가 스코틀랜드 남부를 장악하도록 도왔다.[1] 1055년에는 그리피드 압 르웰린을 격퇴하고 웨일스 왕자들에게 봉신 관계를 강요했다.[1]
2. 4. 후계 문제와 사망
Edward the Confessor영어가 1066년에 사망하면서 후계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이자 이복형제인 에드먼드 2세의 아들 에드워드 애설링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애설링은 1057년에 사망했고, 다시 그의 아들 에드가 애설링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에드가 애설링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귀족 회의는 해럴드를 왕으로 추대했다.해럴드 2세가 즉위하자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반기를 들고 잉글랜드를 침공,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정복왕' 윌리엄 1세로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었다.
12세기 초 말즈베리의 윌리엄부터 역사가들은 에드워드의 계승 계획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에드워드가 정복자 윌리엄을 자신의 상속자로 여겼다는 노르망디 측 주장을 지지하는 견해도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에드워드가 적어도 1051년까지는 에디스와의 사이에서 상속자를 갖기를 바랐다고 생각한다. 정복자 윌리엄은 에드워드의 어머니 노르망디의 에마의 형제인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 2세의 손자였으므로, 둘은 사촌 관계였다. 윌리엄은 고드윈의 망명 중에 에드워드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때 그에게 계승을 약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윌리엄에게 한 약속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그리고 에드워드가 나중에 마음을 바꾸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스티븐 벡스터는 에드워드의 "계승 문제 처리 방식은 위험할 정도로 우유부단했고, 영국이 겪은 가장 큰 재앙 중 하나에 기여했다."라고 평가했다.
3. 웨스트민스터 사원
에드워드는 노르망디 망명 시절, 왕위에 복귀하면 로마를 순례하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즉위 후 이 맹세를 지키려 했으나, 당시 정국 불안정을 이유로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교황 레오 9세에게 조언을 구했고, 교황은 로마 순례 대신 수도원을 짓고 빈민을 구제할 것을 권했다. 왕은 이를 수용하여 성당 부속 수도원을 증축하도록 지시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1042년에서 1052년 사이에 왕실 묘지 교회로 건설되기 시작하여, 1065년 12월 28일에 봉헌되었다. 잉글랜드 최초의 노르만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였다. 1245년에 헨리 3세가 새 건물을 지으면서 철거되기 전까지, 이 건물은 쥐미에즈 수도원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로베르 드 쥐미에즈가 두 건물 모두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느 것이 원본이고 어느 것이 모방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에드워드는 책이나 관련 예술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잉글랜드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가 혁신적이고 관대한 교회의 후원자였음을 보여준다.
4. 성인으로서의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 참회왕은 1161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1] '참회왕'이라는 칭호는 순교자가 아닌 성스러운 삶을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며, 신앙의 고백자라는 칭호도 받았다.
에드워드는 교회 임명에 세속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의 시성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2세기 초,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수도원장 오스베르트 드 클레어는 수도원의 부와 권력을 위해 에드워드의 시성을 추진했다. 1138년, 그는 에드워드의 일대기인 ''에드워드 왕의 전기''를 성인전으로 바꾸고, 에드워드가 독신이었다고 주장했다. 1139년, 스티븐 왕의 지원을 받아 시성을 청원했지만, 이노켄티우스 2세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결정을 연기했다.
1160년, 웨스트민스터의 새 수도원장 로렌스는 헨리 2세와 잉글랜드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아 시성을 재추진했고, 1161년 교황은 시성 교서를 발표했다. 1230년대에 헨리 3세는 에드워드 성인 숭배에 애착을 갖게 되었고, 1269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에드워드를 위한 새로운 무덤을 건설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에드워드 참회왕의 성당은 1269년 10월 13일 그의 시신이 이장된 후에도 남아있다. 10월 13일은 잉글랜드 가톨릭 교구에서 기념일이다. 에드워드 성인은 사망 기념일인 1월 5일에도 기념된다. 잉글랜드 성공회의 성인력은 10월 13일을 소축일로 지정한다.[2] 매년 10월 사원은 축제와 기도를 개최한다. 에드워드는 어려운 결혼의 수호 성인으로도 여겨진다.
5. 평가와 유산
에드워드는 통치자라기보다는 수도사와 같은 면모를 보였으며, 온화하지만 무능한 통치로 앵글로색슨 국가를 안정시킬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노르만인들을 신뢰하여 노르만 정복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비판도 받는다.[5] 반면, 후대에는 덕이 높은 군주로 시성되었고 왕조의 수호자로 존경받았다.
에드워드 참회왕의 신앙심은 1045년부터 1050년에 걸쳐 템스강 상류에 기초를 세운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헨리 3세 이후 잉글랜드 국왕들은 에드워드가 건립한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고, 역대 국왕들은 에드워드 참회왕의 법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 (헨리 3세의 아들 에드워드 1세는 참회왕을 기념하여 이름 지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참회왕 자신이 만든 법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5]
에드워드 참회왕은 노르만 정복 이전 앵글로색슨 국가의 마지막 왕으로서, "자유로운 잉글랜드"에 보급되었다고 여겨지는 법을 상징하는 인물로 연대기에 이상화되어 전설이 되었다. 사후 95년 후인 1161년에 시성되었다.
참조
[1]
서적
A Western Rite Orthodox Martyrology
St. Gregory the Great Orthodox Church
[2]
웹사이트
The Calendar
https://www.churchof[...]
2021-04-09
[3]
서적
ウィズダム英和辞典 第4版
三省堂
[4]
서적
増補新版 図説 イギリスの歴史
河出書房新社
[5]
서적
イングランド憲法史
創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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